바다는 늘 위험을 품고 있다. 특히, 섬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한 연안 해역에서는 작은 판단 착오 하나가 곧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동안 선박 안전은 숙련된 항해 경험과 현장 감각에 크게 의존해 왔다.
물론 그 축적된 경험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전체 해양 선박사고의 80% 이상이 소형선박에서 발생하는 현실 앞에서 이제 안전을 지키는 방식도 더 정밀하고 더 과학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HD현대가 전라남도와 함께 추진하는 해양 AI 자율 운항 실증 클러스터 조성은 단순한 기술 개발 사업을 넘어, 바다의 안전을 어떻게 미래형 시스템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HD현대는 “24일 전라남도청에서 조선 부문 계열사인 HD현대삼호와 아비커스가 전라남도,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국립목포대학교와 함께 ‘전라남도 해양 AI 자율 운항 실증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업무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라고 밝혔다. 이번 협약은 선박사고 비중이 높은 소형선박의 안전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전라남도의 해양 환경을 실증 무대로 삼아 AI 기반 자율 운항 기술의 검증과 산업화를 본격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라남도는 국내 최다 수준인 2,165개의 섬과 복잡한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어 항해 난도가 높고 사고 위험도 큰 해역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조건 때문에 이곳은 자율 운항 기술을 시험하고 고도화하는 데도 가장 현실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협약에 따라 전라남도는 목포, 여수, 고흥, 완도 등 주요 해역을 실증 공간으로 제공하고, 전남 AI 데이터센터와 연계해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위한 행정 지원을 맡는다.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은 선박 안전성 검증과 기술 표준 정립을 담당하고, 국립목포대학교는 자율 운항 기술 연구와 전문인력 양성을 맡는다. HD현대는 여기에 맞춰 지역 특성에 적합한 AI 기반 자율 운항 솔루션 개발과 기술 실증을 주도할 계획이다.
역할 분담도 분명하다. 아비커스는 소형선박에 특화된 AI 충돌 예방 시스템 개발과 데이터 수집·관리 체계 구축을 담당하고, HD현대삼호는 실증 선박에 AI 기자재를 적용하는 지원과 지역 내 양산 기반 조성을 맡는다.
이는 단순히 알고리즘 하나를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 선박에 기술을 적용하고, 그것을 검증하며, 나아가 표준화와 양산까지 연결하는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번 협력은 실험실 안의 기술이 아니라, 현장에서 작동하는 안전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에 가깝다.
이 점이 중요하다. 자율 운항 기술은 종종 미래 산업의 화려한 이미지로만 소비되기 쉽다. 그러나 해양 분야에서 자율 운항의 본질은 편리함보다 안전에 있다. 특히, 소형선박은 대형 상선보다 장비와 인력, 안전 시스템 면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우가 많고, 연안 어선이나 작업선처럼 복잡한 해역을 자주 오가는 선박일수록 사고 예방 기술의 체감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바다에서의 AI는 ‘사람을 대신하는 기술’이기보다 ‘사람의 위험을 줄이는 기술’이어야 한다. 충돌 위험을 더 빨리 감지하고, 주변 해역을 더 정밀하게 인식하며, 복잡한 항로 상황에서 더 나은 판단을 보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산업 혁신인 동시에 생명 보호의 기술이 된다.
더 나아가 이번 협력은 지역과 산업, 공공기관과 대학이 어떻게 함께 움직여야 하는지도 보여 준다. 전라남도는 실증 현장과 행정 기반을 제공하고, 공공기관은 검사와 표준화 체계를 담당하며, 대학은 연구와 인력 양성을 맡고, 기업은 기술 개발과 산업화를 추진한다.
이런 구조는 매우 바람직하다. 미래 산업은 한 기관의 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을 시험할 현장, 그것을 검증할 공적 장치, 연구 인력을 키울 교육 기반, 그리고 실제 시장으로 연결할 산업 역량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 이번 실증 클러스터가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연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데 있다.
전라남도로서도 이번 사업은 단순한 기술 실증 유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해양 모빌리티 산업과 일자리 확대, 지역 해양산업의 고도화, 미래형 조선·해양 기술 거점으로서의 위상 강화까지 함께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은 더 이상 중앙의 기술을 기다리는 수동적 공간이 아니라, 미래 산업을 먼저 실험하고 축적하는 능동적 현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라남도의 복잡한 해역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적 수준의 해양 AI 기술을 검증하는 강점으로 바뀔 수 있다.
물론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해양 AI 자율 운항은 도로 위 자율주행보다 더 복합적인 변수와 맞닿아 있다. 바다에는 차선이 없고, 기상 조건이 급변하며, 선박의 크기와 속도, 조류와 시계 조건, 통신 환경 등이 매우 다양하게 작동한다.
따라서, 기술 실증은 단순한 성공 사례 몇 건으로 충분하지 않다. 충분한 데이터 축적, 반복적인 현장 검증, 안전 기준과 책임 구조, 표준화 체계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임도형 아비커스 대표가 “복잡한 연안 해역에서 확보한 실증 데이터를 바탕으로 AI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기술 검증과 표준화를 함께 추진하겠다”라고 밝힌 것도 그래서 현실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협약의 핵심은 기술 그 자체보다 생태계 조성에 있다. AI 자율 운항은 한 번의 시연으로 끝나는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 축적과 검증, 장비 적용, 인력 양성, 표준 마련, 양산 기반 조성이 모두 이어져야 비로소 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김재을 HD현대삼호 대표가 “기술 개발을 넘어 관련 산업 생태계 조성에도 힘을 보태겠다”라고 한 말은 이 사업의 진짜 무게중심을 잘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