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잠시 스쳐 간 들녘에 산나리꽃이 환한 주황빛으로 피어 있다. 빗물에 젖은 꽃잎은 더 선명해 보이고, 아래로 살짝 젖혀진 꽃잎 위의 짙은 점무늬는 산나리만의 강한 인상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화려한 빛깔과 호피 무늬 같은 독특한 자태를 지녔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요란하기보다 수수하고 정겹다. 그래서 산과 들에 피어 있어도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던 반가운 얼굴처럼 느껴진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았기에 이맘때가 되면 학교로 오가던 오솔길에서 산나리꽃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산기슭에서도 피어 있었고, 밭 가장자리에서도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누가 일부러 심지 않아도 제철이 되면 자기 때를 알고 피어나던 꽃이었다. 그래서 산나리는 단순히 예쁜 야생화가 아니라, 계절의 흐름과 풍경을 함께 이야기해주는 꽃이었다.
산나리는 봄꽃이 모두 지나가고 초록 잎들이 오히려 더 깊은 위로가 되어 주는 한여름, 7월과 8월 사이에 피어난다. 그래서 이 꽃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수준이 아니라, 이제 진짜 한여름이 왔다고 들녘 곳곳에서 외치는 함성처럼 느껴진다. 푸른 잎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주황빛 산나리꽃은 무더운 계절의 풍경을 단숨에 환하게 바꾸어 놓는다.
며칠째 이어지던 가뭄 끝에 반가운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산나리는 꿋꿋이 피어 있다. 비를 맞으면서도 끝내 자기 빛을 잃지 않는 모습이 참 의연하고도 멋스럽다. 화려하지만 약하지 않고, 수수하지만 존재감이 분명한 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산나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은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보여주고 있었구나 싶어진다.
이 꽃은 야생에서 피어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집안 정원에서도 많이 길러진다. 꽃과 뿌리를 약재나 차로 활용하기도 해 단지 감상의 대상에서 그치지 않고 생활 속에서도 쓰임을 지녀 왔다. 그런 점에서도 산나리는 화려한 장식용 꽃이라기보다 사람 곁에 가까이 있는 친근한 꽃이라고 할 만하다.
무엇보다 산나리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자꾸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학교 가던 길, 흙냄새 나던 밭둑, 비 개인 뒤의 풀잎, 여름 햇살 아래 피어 있던 그 시절의 여러 가지 꽃들까지 함께 떠오른다.
꽃 한 송이가 시간을 데려오는 셈이다. 오늘 피어 있는 산나리는 단지 한여름의 들꽃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작은 사립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산나리를 만나는 일은 꽃을 보는 일이면서, 동시에 지나온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