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사회라는 말이 점점 더 자주 들린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자주 언급된다고 해서 곧바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의 책임 아래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지방행정연구원(원장 육동일)이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 ‘기본사회 구현을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 정책세미나는 단순한 학술행사를 넘어,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떤 안전망을 설계해야 하는지를 묻는 하나의 정책적 신호로 읽을 만하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은 17일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기본사회 구현을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을 주제로 정책세미나를 열었다. 이번 세미나는 AI 시대의 산업구조 변화, 저출생과 고령화, 지방소멸, 양극화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어떤 역할을 나누고 협력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는 다수의 국회의원이 공동 개최자로 참여했으며, 한준호 국회의원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육동일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의 환영사, 강남훈 기본사회위원회 부위원장과 성시경 한국행정학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어 최흥석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기본사회의 필요성과 추진전략’을 주제로 발표했고, 고경훈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이 ‘기본사회 구현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을 발제했다. 이후 학계와 연구기관 전문가들이 참여한 토론에서는 기본사회 정책의 방향과 실천 과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한준호 국회의원은 AI 기술 발전과 사회 구조 변화 속에서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할 새로운 사회적 안전망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양극화와 지역소멸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 역할 정립과 협력이 필요하며, 중앙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지방은 주민 삶의 현장에서 정책을 구현하는 협력 체계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육동일 원장 역시 기본사회는 단순한 정책 구호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하며, 중앙의 제도 설계와 지방의 실행 역량이 결합될 때 실질적 성과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세미나가 의미 있는 까닭은 분명하다. 오늘의 위기는 어느 한 부처의 정책이나 한 차례의 예산 편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AI는 일자리 구조를 바꾸고, 저출생과 고령화는 복지와 돌봄의 체계를 흔들며, 지방소멸은 국가의 공간 구조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기본사회’가 단순한 복지 확대의 수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국민이 어느 지역에 살든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운영 원리로 구체화하여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기본사회를 실제로 구현하는 일은 선언보다 훨씬 어렵다. 중앙정부는 법과 재정, 제도의 틀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주민의 삶은 문서 위가 아니라 지역 안에서, 행정복지센터와 보건소, 돌봄 현장과 교통망, 교육 인프라와 주거 여건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기본사회는 중앙에서 설계할 수는 있어도, 지방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현실이 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국가적 과제를 논의할 때 중앙정부의 역할을 지나치게 크게 보고, 지방자치단체를 하위 집행기관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저출생도, 고령화도, 지역소멸도, 생활 돌봄도, 이동권도 결국 지역마다 양상이 다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제는 같지 않고, 대도시와 농산어촌의 조건 역시 다르다. 그런 현실에서 획일적인 정책은 오히려 현장을 놓치기 쉽다. 기본사회가 진정한 사회 운영 원리로 자리 잡으려면 지방은 단순 집행자가 아니라, 정책 공동설계자로 참여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세미나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중앙은 어디까지 책임지고, 지방은 무엇을 주도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기본사회는 다시 추상적 구호로 흩어질 수 있다. 중앙은 제도와 재정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방은 주민 삶의 데이터와 현장 경험을 토대로 맞춤형 실행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양자의 관계는 지시와 수행이 아니라, 협의와 조정, 실험과 확산의 구조가 되어야 한다.
기본사회를 말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것을 제도로 만들고, 예산으로 뒷받침하고, 지역마다 다른 현실에 맞춰 작동하게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개념의 확대가 아니라, 책임의 구체화다. 누가 설계하고, 누가 실행하며, 누가 평가하고, 누가 수정할 것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이번 세미나는 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본사회는 더 이상 정치적 수사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국민이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국가는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체계를 실질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증명의 무대는 결국 지방이다. 중앙이 방향을 세우더라도, 주민이 체감하는 국정은 지역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기본사회는 중앙의 선언으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지방의 손과 발, 그리고 현장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이번 세미나가 그 당연하지만, 자주 잊히는 사실을 다시 일깨운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논의가 아니라, 설계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기본사회는 말의 크기가 아니라, 실행의 밀도로 증명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