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예술 판소리가 호주 시드니 한복판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는 바이링구얼(bilingual·두 나라의 말을 하는) 판소리 ‘긴긴밤’이 지난 2월 13일부터 14일까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 창의센터에서 총 4회의 ‘과정 공유형 쇼케이스’를 선보이며 현지 어린이와 가족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개발 중인 공연을 관객에게 선보이며 반응과 가능성을 함께 점검하는 무대를 ‘과정 공유형 쇼케이스’라고 한다.
이번 공연은 사전 예약 시작과 동시에 모든 자리 매진을 기록했고, 이틀간 약 150명의 관객이 찾았다. 이번 무대는 단순한 해외 초청 공연이 아니었다. 판소리 창작단체 입과손스튜디오(IPKOASON)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가 공동 창·제작한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판소리 고유의 서사 구조와 리듬, 소리의 문법 위에 이중언어, 움직임, 음악적 장치를 결합해 새로운 국제 공연 모델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다. 이는 전통예술의 현대화나 세계화라는 익숙한 구호를 넘어, 전통예술이 다른 문화권의 관객과 실제로 호흡할 수 있는 언어를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자 답변이었다.
관객의 반응은 분명했다. “한국어를 몰라도 음악과 움직임만으로도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판소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라는 소감은 이번 공연의 성취를 압축한다.
13일에는 호주 내 한국어 이중언어 교육거점인 캠시(Campsie) 초등학교 학생들이, 14일에는 일반 가족 관객이 참여했는데,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아이들이 배우의 몸짓에 따라 웃고 울며 서사에 몰입한 장면은 판소리가 더 이상 ‘설명을 들어야 이해되는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원작인 루리 작가의 동화 ‘긴긴밤’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긴 밤을 건너며 연대와 성장, 공존의 의미를 배워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바이링구얼 판소리로 확장되면서 작품의 주제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하나의 리듬으로 호흡하는 모습 자체가 곧 작품의 메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무대는 설명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로 증명해 보였다.
이번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2024년 서울아트마켓(PAMS)이었다. 당시 입과손스튜디오(IPKOASON)의 ‘긴긴밤’ 쇼케이스를 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 측은 작품이 품고 있는 독창적인 리듬감과 서사성, 그리고 ‘다양성’과 ‘연대’라는 주제가 세계 어디서나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 결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가 먼저 한-영 이중언어 버전의 공동 창·제작을 제안했고, 양측은 1년간의 논의를 거쳐 단순 초청이 아닌 국제 공동 창·제작 프로젝트로 발전시켰다.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그동안 한국 전통예술의 해외 진출은 완성된 작품을 외국 무대에 올리는 ‘투어형 진출’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해외 기관이 제작 파트너로 직접 참여해 작품의 국제 버전을 함께 설계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모델이다. 이는 한국 전통예술이 더 이상 ‘보여 주는 콘텐츠’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공연예술 시장 안에서 함께 만드는 창작 자산으로 평가받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연출을 맡은 이상숙은 이번 작업의 목표를 “글씨를 모르는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무대”라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전달 방식 전체의 재구성을 뜻한다. 영어는 한국어 판소리를 설명하는 보조 장치가 아니라, 판소리의 소리와 함께 작동하는 또 하나의 음악적 요소로 기능했다.
자막 없이도 장면의 정서와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새로운 캐릭터와 액자식 구성이 도입됐고, 관객은 언어의 완전한 해석이 아니라, 발음, 리듬, 움직임, 장면의 온도로 작품을 받아들였다. 전통예술의 현대화가 형식을 허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깊이를 새롭게 열어젖히는 데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번 무대가 던진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전통예술의 세계화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외국 관객 앞에 ‘우리 것’을 그대로 내놓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형을 지우고 국제 표준에 맞게 가볍게 번안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언어의 뿌리를 지키면서도 타자의 감각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창조하는 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긴긴밤’은 판소리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판소리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넓혔다.
이번 프로젝트 뒤에는 양국 문화예술기관의 든든한 뒷받침도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한국 재단(AKF)의 후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의 ‘케이-아츠 온더고(K-arts on the GO)’ 사업, 수림문화재단과 출판도시문화재단의 지원은 전통예술의 해외 진출이 개인 창작자의 열정만으로 지속될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한 작품의 해외 성공은 결국 예술가의 상상력과 공공 지원, 국제 파트너십이 맞물릴 때 가능하다.
입과손스튜디오(IPKOASON)는 이번 쇼케이스(showcase)를 바탕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 오는 10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가 주최하는 제1회 국제어린이페스티벌에서 최종 단계의 트라이아웃(tryout·실제 관객 반응까지 포함해 마지막 검증)을 거치는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 무대가 성공적으로 이어진다면, ‘바이링구얼(bilingual) 판소리’는 일회성 실험이 아니라, K-전통예술의 새로운 국제 문법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시드니(Sydney) 아이들이 판소리를 보며 웃고 울었다는 사실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전통예술이 해외에서 ‘소개될 수 있다’라는 수준을 넘어, 다른 문화권의 어린 관객에게도 정서적으로 깊이 도달할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가능성을 일회성 화제로 소비하지 않는 일이다. 판소리의 확장은 더 많은 해외 공연 횟수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교한 공동 창·제작과 번안, 교육적 확장, 지속 가능한 국제 네트워크로 이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에서 열린 ‘긴긴밤’은 그래서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전통예술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였다. 판소리의 지평은 무대 위에서 넓어졌고, K-전통예술의 미래는 그 넓어진 지평 위에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