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오랫동안 생산의 문제로만 다루어져 왔다. 얼마나 많이 재배하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유통하며, 얼마나 높은 소득을 올릴 것인가가 중심이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농업은 단순한 산업을 넘어 한 지역의 시간과 기억, 기술과 생활방식,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함께 축적된 문화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정읍 지황 농업시스템」의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은 단순히 특정 작물 재배의 가치를 인정한 일이 아니다. 이는 전통 농업기술과 지역 고유의 농업문화를 미래세대에 남길 공적 자산으로 선언한 일이며, 농촌을 다시 바라보는 시선을 한 단계 넓히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3월 2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정읍 지황 농업시스템」에 대한 제20호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서와 지정패를 이학수 정읍시장에게 수여했다. 이번 지정으로 우리나라의 국가중요농업유산은 모두 20호가 됐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정읍 지황 농업시스템이 지황 재배와 숙지황 가공, 쌍화차거리 등으로 이어지는 농업문화와 자연친화적 윤작 체계를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정읍 지황 농업시스템의 핵심은 단순히 지황을 재배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시스템은 지황 재배를 중심으로 가공과 유통, 지역의 생활문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지황, 고추, 고구마, 감자, 참깨 등으로 이어지는 5년 주기의 윤작 체계는 토양을 살리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가능하게 하는 전통적 지혜를 보여 준다. 이는 화학적 투입과 단기 생산성에 치우친 현대 농업과는 다른 결을 가진다.
자연의 리듬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농업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오래된 방식이 오늘의 기준으로도 여전히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 지정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중요농업유산은 오래된 농사법을 단순히 기념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지역의 전통 농업기술과 농촌 문화, 생태적 순환 체계를 보전하면서 그것을 현재의 지역 발전과 연결하려는 정책적 장치다.
다시 말해 농업 유산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잘 가꾸면 관광과 교육, 문화와 지역경제를 함께 살릴 수 있는 미래 자산이다. 송미령 장관이 “국가중요농업유산이 지역의 관광·문화·농촌자원과 연계되어 농촌의 활력 제고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라고 밝힌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읍의 지황 농업시스템은 특히 농업과 지역 정체성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어떤 지역은 특정 작물 하나가 단순한 생산품을 넘어 그 지역의 이름과 이미지를 형성한다. 정읍의 지황도 그렇다. 지황을 기르고, 이를 숙지황으로 가공하고, 다시 지역의 건강음료 문화와 연결하는 과정은 농업이 단지 밭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상업, 문화의 흐름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은 농산물 하나를 넘어서 지역 전체의 서사를 형성하는 힘이다.
오늘날 농촌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소득 정체와 지역 소멸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업유산 지정은 단순한 명예로 그쳐서는 안 된다. 지정 이후가 더 중요하다. 지역 주민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청년과 방문객이 그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하며, 교육과 관광, 로컬 브랜드 전략과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은 보존될 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다시 쓰일 때 비로소 살아난다. 따라서, 정읍 지황 농업시스템 역시 보호의 대상으로만 남기보다, 지역의 활력을 이끄는 자원으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학수 정읍시장이 전통 농업기술과 문화가 후대에 보전·계승될 수 있도록 농림축산식품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요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농업유산은 지역의 노력만으로 충분히 지켜지기 어렵다.
중앙정부의 정책 지원, 예산, 연구, 홍보, 관광 연계 전략이 함께 가동되어야 한다. 그래야 농업유산이 이름만 남는 지정이 아니라, 실제로 지역 주민의 삶과 연결되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지정은 우리에게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묻게 한다. 농업은 낡은 산업이 아니라, 한 사회가 자연과 맺어 온 관계의 총체다. 그 안에는 생산기술뿐 아니라, 계절을 읽는 감각, 토양을 돌보는 지혜, 마을 공동체의 생활방식, 세대를 거쳐 이어진 경험이 함께 담겨 있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단순히 한 작물의 재배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지역이 축적해 온 시간의 방식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농업유산은 과거를 박제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지혜를 오늘의 가치로 다시 읽어 내는 일이며, 사라질 수 있는 지역의 시간을 미래의 자산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정읍 지황 농업시스템」의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은 정읍만의 경사가 아니라, 우리 농업과 농촌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적 장면이다.
농업의 미래는 첨단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래된 기술과 문화, 자연과 공존하는 지혜를 어떻게 이어 가느냐도 함께 중요하다. 정읍의 지황밭이 품고 있는 시간은 그래서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잘 지켜 낸다면 앞으로의 농촌을 창의적으로 변화시킬 미래의 씨앗으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