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성공을 말해 왔다. 그러나 정작 성공이 무엇인가를 두고는 한 번도 완전히 같은 답에 이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부를 성공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떠올리며, 또 어떤 이는 자기 소명을 다하는 삶을 성공이라고 여긴다. 시대마다 기준이 달랐고, 사회마다 평가 방식도 달랐다. 그러니 성공의 기준이 동서고금을 살아간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모두 비슷한 몸과 얼굴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지문 하나까지 완전히 같은 사람은 없다. 바로, 이 차이가 인간의 다양성이며, 특별함이고, 각 사람이 존귀한 존재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성공 역시 하나의 틀에 억지로 밀어 넣듯 규정하거나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기준도 없이 살아가서도 안 된다. 삶에는 다양성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흔들리지 않는 대전제도 필요하다. 그 대전제는 바로 사람됨의 실현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것, 이것이 모든 성공 논의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해도 사람됨을 잃었다면 그것은 성공의 외형만 갖춘 것일 뿐 실패한 삶이다. 반대로 세상이 크다고 부르지 않는 삶이라고 해도 사람됨을 지키며 타인을 살리고 공동체를 따뜻하게 했다면, 그 삶은 이미 깊은 의미의 성공에 가까운 것이다.
사람됨의 핵심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에 있다. 내가 상대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은가를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태도다.
자공문왈 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자왈 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의 「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자공의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한 마디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관한 공자의 대답은 “그것은 바로 용서(恕)이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매우 분명하게 가르친다. 마태복음 7장 12절과 누가복음 6장 31절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한다.
이른바 황금률(Golden Rule)이다.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오래된 원칙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지 상호주의를 지키라는 정도가 아니다. 상대가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잘해 주겠다는 계산적 태도를 넘어, 내가 먼저 친절과 존중, 사랑과 공감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능동적 결단이다.
우리는 흔히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먼저 따지고, 거기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황금률은 그 반대 방향을 요구한다. 남이 나에게 행한 대로 갚는 관계에서 벗어나, 내가 대접받고 싶은 바로 그 방식으로 먼저 행동하라는 것이다.
내가 상대의 처지라면 어떤 말을 듣고 싶을지, 어떤 배려를 받고 싶을지, 어떤 존중을 원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비판받기 싫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하고, 친절을 원한다면 먼저 친절하게 해야 한다. 이해받고 싶다면 먼저 이해하려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원리다. 이에서 벗어나는 만큼 갈등이 발생한다.
삶은 대체로 자기가 뿌린 것을 어느 방식으로든 거두게 되어 있다. 흔히 메아리의 법칙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에 대고 외친 소리가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듯, 사람이 세상에 던진 말과 태도는 돌고 돌아 자기 삶의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므로 성공적 삶의 길은 남보다 많이 가지는 길이 아니라, 먼저 사람답게 사는 길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 위에서 각자는 자신의 특성과 향기, 재능과 소명에 맞는 기준을 세우면 된다. 누군가는 학문으로, 누군가는 예술로, 누군가는 사업으로, 또 누군가는 조용한 섬김으로 삶의 보람을 채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남의 기준을 흉내 내는 데 있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결을 따라 기쁨과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이것이 진정한 다양성이며, 건강한 조화다. 자연도 그렇다. 숲의 나무가 모두 같은 높이와 모양으로 자라지 않고, 꽃마다 향기와 색도 다르다. 이처럼 사람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다양성은 혼란이 아니라 질서이며, 조화는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제자리를 찾을 때 생긴다.
자연과 인간은 이 점에서도 서로 닮았다. 자연은 자기 몫을 다하며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 강은 흐르고, 바다는 받아들이며, 나무는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맺는다. 어느 하나 혼자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홀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다.
그런데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 원리를 거스른다. 자기만 높아지려 하고, 자기만 많이 가지려 하며, 타인을 수단처럼 여기고, 공동체와 자연을 함부로 훼손한다. 그 순간 삶은 조화에서 이탈하고, 존재는 파괴의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겉으로는 성공처럼 보여도 실은 자기와 세상을 함께 무너뜨리는 길로 가는 행위다.
이런 폭력적 삶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심판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추상적이거나 먼 이야기처럼 듣지만, 사실 그 원리는 아주 분명하다. 인간은 아무리 부와 권력을 많이 쌓아도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움켜쥔 것들을 죽은 뒤에도 계속 행사할 수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한계이며, 동시에 심판의 한 형태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영원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결국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더 많이 가지는 법을 배우는 데 있지 않고, 언젠가 내려놓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미리 깨닫는 데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만큼 삶의 질은 높아진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어떤 태도가 결국 자기 삶을 살리는지를 자각할 때 비로소 불필요한 욕망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메타인지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는지, 내 삶이 사람됨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삶은 방향을 잃기 쉽고, 방향 없는 노력으로 이룬 성취는 공허함을 초래한다.
성공적 삶의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람됨을 바탕에 두고,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타인을 대하며, 각자 자기에게 맞는 기준으로 기쁨과 보람을 쌓아 가는 삶이다. 이와는 반대로 욕심과 파괴, 자기중심성으로 기울어질수록 삶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내면은 허물어진 상태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자기 존재의 한계와 책임을 자각하며,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태도를 지킨다면 그 삶은 이미 성공의 길 위에 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느냐이다. 그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성공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성공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깨달음과 결단이 바로 그 사람의 수준이고 품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