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네트워크추천뉴스기고2026. 7. 7. 오후 6:52:45

나의 자유라고 절대적인가

박시우 작가
나의 자유라고 절대적인가

자유는 소중하다. 누구나 자기 취향대로 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며, 남의 간섭 없이 자기 삶을 꾸려 갈 권리가 있다. 현대사회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도 결국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자유는 언제나 질문을 동반한다. 나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는가. 그리고 그 자유가 다른 사람의 평온과 권리를 침해할 때에도 여전히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거창한 정치 담론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서 더 자주 마주한다. 집 주변이나 아파트 단지 안을 산책하다 보면 스마트폰 소리를 크게 틀어 놓고 걷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같은 방향으로 걷다가 보면 그 소리가 생각보다 멀리까지 따라오고, 산책의 평온은 금세 깨진다. 

어떤 이는 음악을 틀고, 어떤 이는 영상이나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이어간다. 정작 본인은 자유롭게 걷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소음에 노출된다. 문제는 그 행위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 반복된다는 점이다.

과연 이것을 단순한 취향의 차이로만 볼 수 있을까. 자기의 자유라고 해서 남에게 불편과 손해를 끼쳐도 되는가. 자유는 본질적으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자유가 공용 공간에서 타인의 평온을 깨뜨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자유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배려의 문제이고, 공공성의 문제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기본 질서에 관한 문제다.

사실 이런 일은 실외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자기 집 안에서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그 소리가 벽을 뚫고 이웃집에까지 소음으로 전달될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 안은 사적 공간이지만, 공동주택은 완전히 고립된 섬이 아니다. 층간소음이나 늦은 밤의 고성, 과도한 음향은 이웃의 휴식과 수면을 침해한다. 

그렇다면 실외 공용 공간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며 큰 소음을 내는 행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공용 공간은 모두의 공간이지, 한 사람의 취향을 과시하거나 그것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행동이 단순한 습관을 넘어 한 사람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왜 어떤 사람은 이어폰을 꽂지 않고 굳이 모두가 듣도록 소리를 틀어 놓는가. 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듣는 음악이 타인에게는 소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결국 그 바탕에는 공감 능력의 부족이 있다. 나에게 즐거운 것이 타인에게는 불쾌할 수 있다는 상상, 내 행동이 다른 사람의 하루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인식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의범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성의 문제다.

사회성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 핵심에는 자기 욕구를 무조건 앞세우지 않고, 상황과 공간, 타인의 존재를 고려하는 태도가 들어 있다. 공공장소에서의 질서는 강력한 법률 조항보다, 이런 상식적 자기 절제에서 더 자주 유지된다. 그런데 상식이 무너질 때 사회는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도 피로해진다. 작은 소음, 작은 무례, 작은 이기심이 쌓여 공동체 전체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게 되고, 공용 공간은 쉼의 장소가 아니라, 참아야 하는 장소로 변한다.

자유는 원래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민주사회에서조차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 안전, 평온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보장된다. 내가 팔을 휘두를 자유는 내 옆 사람의 코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오래된 비유는 지금도 유효하다. 자기표현의 자유, 취향의 자유, 생활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타인의 삶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순간, 자유는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 자유와 책임은 서로 반대말이 아니라, 원래 한 몸이다. 책임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식이 점점 흐려지는가. 한 가지 이유는 기술의 편리함이 인간의 감각을 더 세심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무디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고, 통화하고, 세상과 연결되는 시대다. 그러나 편리함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인격까지 자동으로 높여 주지 않는다. 

오히려 편리한 도구일수록 더 높은 윤리와 배려가 필요하다. 이어폰이 있음에도 굳이 스피커로 소리를 틀어 놓는 행위는 기술을 잘못 쓰는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살게 할 때 가치가 있는데, 타인의 평온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면 편리함은 문명의 이점이 아니라, 문명이 만든 피로가 되고 만다.

결국 이 문제는 소음 자체보다 사람됨의 문제로 이어진다. 자기의 자유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태도는 대개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남이 느끼는 불편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런 사고 위에서 유지될 수 없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내 욕구를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내 행동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피는 데서 시작된다. 사람됨을 훼손하는 행위는 그래서 사소해 보여도 전혀 가볍지 않다.

교육은 바로 이 지점을 가르쳐야 한다. 도덕성과 인격은 시험 문제 몇 개 맞힌다고 생기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내 자유가 어디서 타인의 권리와 만나는지, 왜 배려가 문명의 기본인지 반복해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런데 이런 교육이 부실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자기 기준만 앞세우게 된다. 상식이 무너지면, 법을 동원하기 어려운 일상 속 수많은 문제가 그대로 방치된다. 그러면 공동체는 작은 무질서 속에서 계속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생활은 점점 더 편리해진다. 그러나 그 발전이 인간의 품격까지 자동으로 끌어올려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더 필요한 것이 사람다움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공공장소를 함께 쓰는 감각, 자기 자유를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품성 말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런 기본이 무너지면 사회는 더 편리해지는 대신 더 거칠어질 수 있다.

나의 자유라고 절대적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자유가 다른 사람의 평온과 권리를 깨뜨리는 순간 이미 절대적일 수 없다. 공용 공간에서 큰 소음을 내는 작은 행동 하나가 왜 문제인지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 

자유를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내 행동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을 때, 자유는 비로소 품격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살 만한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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