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네트워크추천특집기고2026. 4. 3. 오후 12:27: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나와 너』

박시우 작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나와 너』

오늘은 성금요일(聖金曜日)이다. 성금요일은 단지 한 종교적 절기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와 고통,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그리고 참된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처형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건은 오늘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를 다시 묻고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하게 해석한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한복음 19장 16-2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9장 30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5-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장 24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0절)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오늘의 우리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십자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 개인의 고난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화목하게 되는 사건이며, 인간이 자기 죄와 자기중심성에서 돌이켜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부름을 받게 되는 사건이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통해 인간이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사랑을 따라 새로운 삶의 질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교리이기 전에 관계의 혁명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 이웃, 친구, 동료, 사회, 민족,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울고 웃고, 상처도 받고 화해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맺고 있느냐에 있다. 

가까운 사람을 가장 깊이 사랑하면서도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것, 함께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한 사회 안에서 공존하면서도 타인을 도구처럼 대하는 것이 오늘 인간 현실의 비극이다. 그러므로 성금요일의 의미를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결국 관계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이해할 것인가와 맞닿아 있다.

이 지점에서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는 매우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부버는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나-너”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그것”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는 상대를 단순한 대상이나 수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격적 존재로 바라보는 관계다. 여기에는 진정한 마주 봄이 있고, 경청이 있고, 존중이 있고, 존재의 깊이에 대한 인식이 있다. 

반면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상대를 도구화한다. 상대를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편리함과 이익의 대상처럼 다루는 관계다. 현대 사회의 많은 관계가 바로 이 “나-그것”의 구조 속에서 무너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십자가는 바로 이 “나-그것”의 세계를 뒤집는 사건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위협으로, 종교적 문제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다. 곧 철저히 “그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인간을 끝까지 “너”로 대하셨다. 배반한 제자도, 조롱한 군중도, 자신을 못 박는 자들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외면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그것”처럼 대했어도, 하나님은 인간을 끝까지 “너”로 부르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죄 사함의 도구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존재를 대하는 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지만, 참된 “나-너”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궁극적인 나-너”의 관계로 설명했다. 이 말은 우리가 타인을 진정한 “너”로 대하는 순간, 단지 인간관계를 잘 맺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도 깊은 관계로 접속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실할수록 인간과의 관계도 달라져야 하며,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마주 봄이 일어날 때 하나님 나라의 평화도 조금씩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를 돌아보면 여전히 전쟁의 소식이 들려온다. 국가와 국가 사이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분열과 적대가 깊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쉽게 표면적 이름으로 부르고, 진영으로 나누고, 기능으로 판단하고, 이익에 따라 평가한다. 

상대를 한 인격으로 만나기보다, 입장과 효용과 감정의 대상으로 다룬다. 이것은 거대한 국제정치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가정 안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일상의 작은 관계 속에서도 반복된다. 그래서 전쟁은 멀리서만 들리는 총성이 아니라, “나-너”가 무너지고 “나-그것”만 남은 세계의 총체적 증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금요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단순히 경건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의 방식으로 관계를 다시 세우라는 부름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다시 “너”로 볼 수 있는가. 내게 쓸모가 없다고 여긴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할 수 있는가. 내 주장과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상대의 존재를 먼저 존중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서는 것도 성금요일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부버의 말처럼 감정은 사람 안에 깃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랑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 어떤 언어로 대하느냐, 그 사람의 존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사랑이 추상이 아니라 희생과 화해, 인내와 책임의 형태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너를 너로 보라”고 말하는 부르심이다.

성금요일을 맞아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나는 타인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는가. 십자가는 우리를 용서의 자리로 부르고, 동시에 관계를 회복하는 자리로도 부른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보다 작지만 분명한 실천이다. 누군가를 “그것”처럼 대하던 습관을 멈추고 “너”로 바라보는 것, 상처와 미움으로 굳어진 마음을 조금씩 풀어내는 것, 평화를 말하기 전에 내가 있는 자리에서 화해의 언어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성금요일을 삶으로 번역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그리고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는 다시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구를 진정한 “너”로 만나고 있는가? 

이 두 질문이 오늘 우리 안에서 만날 때, 성금요일은 또 한 번의 기념일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나-그것”의 세계를 내려놓고 “나-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가 기뻐하는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박시우 작가
박시우 작가
psy@newsnetp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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